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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출장안마 서초구출장 역사에대해서 알아볼까요?

이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 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 강남구 역삼동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선사유물, 서초구 원지동의 지석묘군 등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도 일찍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면서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하였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였으며, 서초구 지역은 고구려 때 율목군(栗木郡)에 속했다가 통일신라 이후에는 율진현(栗津縣)이 되었다.

후삼국시대 ‘서초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 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인 금주강씨(衿州姜氏 혹은 衿川姜氏) 세력과 풍덕유씨(豊德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금주강씨는 금천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풍덕유씨 세력들은 한강 하류의 마포 서쪽지역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다.

고려 건국 후 한주를 광주(廣州)로 바꾸고, 율진현은 과주(果州)로 바뀌었다.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광주목이 되었고, 995년에 고려의 행정구역을 5도로 나누면서 광주에는 절도사를 두어 그 군대를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 짓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이후 1018년(현종 9)에 다시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광주목이 되었고, 과주는 광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과주는 달리 부안(富安)·부림(富林)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수도를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옮기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1394년(태조 3)에 먼저 경기도를 좌·우도로,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교주도를 강원도로, 서해도를 풍해도로 바꾸었는데, 이때 서초구는 경기좌도 과천군(果川郡)에 소속되었다. 1413년에는 과천현이 되어 현감(縣監)이 두어졌다. 이후 이 지역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東面)·상북면(上北面) 지역과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彦州面) 지역에 해당되었다. 즉 서초동·양재동·원지동·우면동은 과천군 동면에, 잠원동·반포동·방배동은 과천군 상북면에, 염곡동·내곡동·신원동은 광주군 언주면에 각각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과천군은 인천부(仁川府)에, 광주군은 한성부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됨에 따라 광주군은 경기도 제1등 광주부로, 과천군은 경기도의 제4등 군으로 변경되었으며, 1906년에는 광주부가 광주군이 되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지방제도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행정 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여 1914년에 지방제도를 12부 317군에서 12부 220군으로 폐지 혹은 통합하였다. 이때 과천군 상북면과 동면 지역은 시흥군(始興郡) 신동면으로 개편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하였다.

당시 시흥군 신동면의 하위 행정 구역인 7개 리는 서초리, 잠실리, 반포리, 양재리, 우면리, 신원리, 방배리 등이며, 언주면에는 염곡리, 내곡리, 신원리의 행정구역이 있었는데 이들 지명은 현재까지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은 광복 이후에도 경기도 시흥군과 광주군에 분할, 소속되어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이때 서울시의 영역을 대규모로 확대하면서 10개 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광주군 언주면 지역에는 성동구 언주출장소가, 시흥군 신동면 지역에는 영등포구 신동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탑곡동, 양재동, 남성동, 서초동, 잠포동의 5개 동사무소를 두어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1975년 성동구 영동출장소와 천호출장소 관할구역의 48개 동을 독립시켜 서초구의 모체인 강남구를 신설하였으며, 1980년 관악구 관할구역 가운데 방배동 일원과 동작동·사당동 일부가 강남구로 편입되었다.

1988년에는 강남구의 11개 법정동인 서초동, 잠원동, 반포동, 방배동, 도곡동, 양재동, 우면동, 내곡동, 원지동, 염곡동, 신원동을 분리하여 서초구를 신설하였다. 1989년에는 강남구 포이동 일부를 서초구 양재동에 편입시키고, 서초구 도곡동을 강남구에 편입시켜 서초구출장안마 는 10개 법정동을 가지고 있다.

서초구 지역이 현대 도시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서울특별시 기본계획에서 부도심으로의 개발이 결정되어 1968년 영동 제1차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이다. 그 후 연차적인 토지구획 정리사업에 의해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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