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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출장안마 성북구출장 역사에대해서 알아볼까요?

이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온조(溫祚)가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백제(百濟)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통일을 달성한 후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이로 인해 성북구는 한산주의 한양군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시대 ‘성북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 양주(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천되지 않았다.

그 뒤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한양이 물망에 올랐고, 왜구의 침략으로 한양천도론이 고개를 들었다. 우왕과 공양왕 때는 일시 한양천도가 단행되기도 했으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는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성북구출장안마 지역에는 고려시대 남경의 영화를 보여주듯 보문사(普門寺)·미타사(彌陀寺)·경국사(慶國寺) 등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 천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여러 지역이 도읍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태조는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성북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의 지역으로 후기에는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 속하였다. 특히 성북구는 도성의 북쪽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지명이 유래되었고, 서울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을 지나 원산에 이르는 동북방 간선도로가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여진과의 통로가 되었음은 물론 노원구 일대의 누원점(樓院店)과 연계되어 상인들이 통행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 외에 동활인서 등 빈민구제기관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으며, 삼선평(三仙坪)에는 군사 훈련이 실시되고 성곽 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북창(北倉)이 있었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경성부 관할의 숭신면(崇信面)과 인창면(仁昌面)이 되었고,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36년 경성부의 구역이 확장되면서 숭인면의 23개 리 가운데 14개 리가 경성부에 편입되어 동부출장소의 관할 하에 들어갔고, 나머지 9개 리는 그대로 고양군 숭인면으로 남게 되었다.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동부출장소는 동대문구역소와 성동구역소로 나뉘었고, 이 지역은 동대문구역소에 속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 16일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면서 동대문구역소도 동대문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9년에는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숭인면 전 지역이 서울시 구역에 편입되었고, 동대문구 관내의 일부와 숭인면 지역을 합하여 성북구가 탄생되었다.

1955년에는 종래의 동회(洞會)를 동(洞)으로 개칭하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성북구에는 23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1962년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蘆海面, 노원구 일대)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성북구의 관할구역이 대폭 확장되어 1970년에는 45개의 행정동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되면서 성북구의 관할구역은 대폭 축소되었고, 1975년에는 성북구의 석관동, 종암동, 안암동4·5가의 일부가 동대문구로, 성북구 정릉동과 하월곡동 일부는 도봉구로, 동대문구 보문동1~7가와 신설동 일부는 성북구로, 도봉구 미아동 일부는 성북구로 각각 편입 조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성북구에는 모두 32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이후 인구증가에 따라 분동이 이루어져 성북구에는 39개의 법정동과 20개의 행정동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북구(城北區))]